찰스 다윈과 캐리커처

18~19세기에는 사진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물 얼굴을 캐리커처로 실었다. 당시 <종의 기원>을 쓴 진화론의 아버지라 불리는 찰스다윈도 마찬가지였다.


진화론은 생물이 자연선택에 따라 형태적으로 진화한다는 이론이다. 19세기 이전에도 진화에 대한 이론이 꾸준히 재기되어왔지만 대중 앞에 불을 짚힌 건 다윈이 최초라 할 수 있다.

다윈은 22세가 되던 해 비글호를 타고 세계를 여행하면서 바닷가 동식물을 관찰하며 연구를 발전시켰는데, 특히 남미의 갈라파고스 제도에서 만난 핀치라는 새는 지역의 특성에 따라 약간씩 다른 형태를 띠었고, 이것이 진화론의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보고 있다.

1859년 다윈은 <종의 기원>이라는 것을 출간했는데, 책의 내용을 보면 유리한 변이는 살아남고, 불리한 변이는 도태되어 조금씩 모습이 진화되어 왔다는 것이다.

<종의 기원>이 출판되자마자 하루 만에 1쇄가 모두 팔려 버렸고, 이듬해 2쇄가 출판되었는데, 역시 엄청난 속도로 판매되어 순식간에 유명인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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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관심에도 불구하고 과학자나 고고학자, 종교계에서 모두 종의 기원을 지지 하지는 않았다. 특히 종교계에서는 반발이 매우 컸는데, 창조에 완전 위배되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생물학자에게도 지지를 얻지 못했고, 다윈의 스승인 헨슬로 조차 진화론을 부정하였다.

<종의 기원>은 생전에 유렵과 미국에서 6쇄까지 출판되어 큰 관심을 받았지만 그가 졸업한 케임브리지대학 도서관 등 몇몇 학교에서는 20세기 중반까지 금지 서적이 되어버렸다.

1871년 <인간의 계보와 성 선택>이라는 인류 진화의 내용을 담은 서적을 출간하였다. 그가 신간을 내놓자 시사 매거진 <호넷>은 오랑우탄의 몸과 다윈의 얼굴을 합성한 그림을 실었는데, 이것이 캐리커처의 전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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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은 우스꽝스런 그림으로 조롱거리가 되곤 하였지만 20세기가 되자 영화에서도 진화론을 다룰 만큼, 교과서에 실릴만큼 큰 지지를 얻게 되었다.

하지만 과학이 발전하면서 문제점도 하나둘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도저히 진화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발목을 잡기 시작한 것이다. 그건 확률과 DNA에 있다.

생명의 언어라 불리는 DNA는 우연히 생겨날 확률이 불가능하다. 수학적으로도 그렇고 자연적으로 개체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사실이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큰 화제의 인물을 캐리커처로 실었던 당시, 그 중심에는 찰스다윈이 있었고, 사실적인 그림보다는 사건과 인물을 풍자한 그림이 더 주목을 받았던 시대, 한 장의 그림으로 모든 것들을 표현하였다.


참고 : Dream - Book Times 2019.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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